이유없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이유.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교회나 기독교에 대한 말을 꺼내면 무조건 싫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믿지 않는 분에게 목장에 오라고 초대를 할 때, 흔히 돌아오는 반응은 “교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난 안 가요.”, ‘기독교에 대해서는 나도 알 만큼 아는데, 일 없어요.’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하고 대화의 싹을 잘라버리는 말들입니다. 이러한 말들을 스스럼없이 하는 분들은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그 대상에 대한 경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멸하지 않고는 그렇게 반응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정말 경멸해도 될만큼 기독교에 대해서 충분히 경험했거나 기독교에 대해 이해하고 계시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경멸은 대부분 내 경험에서 나오기 보다는 내가 높아지기 위한 수단에서 나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존경받고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람은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키움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대신 어떤 대상을 경멸하므로 그렇게 합니다.
누군가를 깔보면서 높아지고, 누군가를 멸시하면서 본인을 높이는 것이지요. 기독교를 경멸하면 기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일단 내 밑에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모습인데도 그런 잘못된 세상을 사는 방법과 의도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반대가 좋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창의력과 사고의 능력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곳에서도 발휘가 되어서 부부지간의 관계에서 또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객관적인 사고를 못하게 해서 관계를 깰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뭔가를 반대하려면 선입견이나 정확하지 않은 남이 제공한 정보가 아니라 내가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경험해 보고 난 후 결정한 근거로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태도가 좋지 않은 이유는 그런 태도 안에 우리의 인생을 사는 교만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조건적인 반대는 뭔가 내 자리가 확고한 사람에게서 주로 나타납니다.
나 스스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하던 것이 조금만 흔들리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거기에 비해 기독교는 내가 경멸할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위인들과 철학자들과 지성인들과 석학들이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온 자아(自我)를 걸었던 대상입니다.
열쇠를 찾다가 없으면 그 다음은 ‘있을리 없어보이는 곳’을 뒤져 보아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인생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나의 온 자아(自我)를 걸어 볼 만한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난 절대로 안 가요. 말도 꺼내지 마세요.”하는 식의 무조건적인 거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쪼록 복음을 잘 듣고 살펴서 경험한 뒤에 답을 내어놓아도 될 것입니다.